“80년 서울의 봄, 재야는 나를 대통령 만들려고 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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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육성 회고록 〈11〉
  1979년 말, 박정희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의 18년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세상은 민주화가 다 된 듯 설익은 낙관론에 젖었다.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김재규의 10·26 사건은 박정희의 서거와 함께 유신 시대에 종말을 고했으니 들뜬 만도 했다.
 
이즈음 ‘전두환’이란 낯선 인물이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보안사령관(소장)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그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그는 “주범 김재규가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욕이 빚은 내란 목적의 살인사건이며 군부의 개입은 없었다”고 규정했다. 그때만 해도 전두환이 신군부의 최고 실력자라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 김대중(DJ)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10·26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국민들은 충격에서 벗어나고 사회 불안도 누그러들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빈 공간을 채울 주도적 세력이 없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정부,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주축이 된 군부, 집권당 민주공화당과 야당 신민당의 정치권이 제각기 암중모색하던 혼돈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위태롭다”고 느꼈다.
 
“계엄 해제는 호랑이의 어금니 빼기”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최규하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였다. 희대의 하극상이 벌어졌다. 전두환이 헌병대를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보내 총격전을 벌인 뒤 자신의 직속 상관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기사 원문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9868?cloc=daily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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